tag: 내 이야기

그냥 하기

2018년 4월 2일

어제는 저스틴님네 놀러가서 맛밥 맛고기도 먹었다. 오랜만에 좀 먹먹했던 기분도 풀리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감사하게 집까지 바래다 주셨고 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가 계속 생각에 걸려서 짧게라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예전엔 뭔가 하게 되면 고민하는 단계 없이, 지체 없이 시작하는게 가능했는데 요즘은 그런 “그냥 하기”가 참 어렵다는 얘기였다. 요즘은 그게 잘 안된다. 복잡한 이유를 찾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민 없이 하는게 쉽지 않아졌다.

생각해보면 그게 가능했던 당시에는 왜 사람들이 그냥 하지 않을까 하면 되는데 하는 오만한 얘기도 많이 했다. 하고싶은 일을 큰 고민 없이 하는 것도 얼마나 많은 부분이 조화되어야 가능한 것인지 지금 와서야 많이 느낀다. 너무 작아서 미약하게 느껴지는 시간도 의자에 앉아서 꾸역꾸역하는 일도, 주변에 물어보거나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흥미가 꺼지지 않고 계속 배우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일도.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다보면 무엇 하나 시작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원과, 충분한 동기와 자원이 필요한 일인지 생각한다.

이런 답을 고민하기보다 그냥 하면 된다. 왜 안될까 고민하면 끝도 없고, 종이 뒤집듯 고민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빠르다. 그냥 시작하고 나서 처음에는 좀 꾸역꾸역이라도 근육이 생길 때까지는 해야 한다. 꾸역꾸역은 단순하게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다. 그 구간만 지나면 재밌어진다. 그런데 꾸역꾸역하는 지점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박수치고 싶다.

예전에 비해서 생각해야 할 점도 많고 고민도 많은게 당연하긴 하지만 그게 뭔가를 뒤로 미루는 이유가 되는거는 스스로에게 실례라는 기분도 든다. 내 스스로에게 많은 이유를 붙여가며 안하는 것은 그냥 내 뇌가 나를 속이는 일 같다. 설거지 거리를 쌓는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정리해야 한다.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알면서도 쌓고 있지만…

예전처럼 그냥 했으면 좋겠다.

하우스키핑

신년맞이 블로그 정리

2018년 2월 11일

한참 미루던 블로그를 정돈했다. 새로운 도메인을 구입했는데 그쪽으로 옮길까 하다가 신경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정리만 했다.

  • 새로운 테마를 만들까 싶었지만 엄두가 안나서 기본 테마를 손질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Twenty Fifteen를 사용했다. 깔끔. 서체 크기를 좀 변경하고 헤드라인을 추가했다.
  • 본명조Freight Text Pro를 적용했다. 지금은 Typekit을 사용하고 있는데 동적으로 로딩하는 식이라 뒤죽박죽 보일 때가 종종 있다. 호주 인터넷이 느려서 그렇겠지만. 본명조도 스포카 한 산스처럼 얼른 작고 빠른 웹폰트 패키지로 나왔으면 좋겠다.
  • dns 서비스를 cloudflare로 변경했다. 덕분에 https도 손쉽게 적용했다. dns propagation이 느려서 답답했다.
  • 위젯을 바꿨다. 기존에 쓰던건 그냥 많이 조회되는 순서로 나오는 위젯이었는데 이제 직접 선정한 글만 나온다. 한땀한땀 html로 되어 있는 목록이다.
  • 헤더 이미지로 svg를 넣을 수 있게 수정했다. (플러그인 있어서 설치) OpenGraph는 svg를 지원하지 않아서 소셜 카드에서는 좀 밍밍하게 보일 것 같다.
  • 오래된 글은 메시지를 넣었다.
  • 내용이 오래된 페이지는 메뉴에서 뺐다.
  • 코드 하일라이트 색상을 바꿨다. hightlight.js에서 조금 눅눅하고 밝은 색인 Atelier Estuary Light으로 골랐다.
  • 덧글 기능을 다시 활성화했다.

보기엔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만드는 일도 즐겁지만 다듬는 일도 재미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카테고리 분류가 엉망이라 색인을 다시 만들어서 정리할 생각이다.

spray

정리하면서 이전에 쓴 글도 읽게 되었다. 지금 내 생각과는 다른 부분도 많고 누군가 읽고 상처받을 만한 글도 보였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블로그에 너무 많이 쏟아서 내 스스로도 이 블로그 주인은 일상에 문제가 좀 있나보군, 생각이 들 정도다. 잘 모를 때 썼거나 그냥 어리고 부족한 글도 많다. 이런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어진다. 눈앞에서만 치운다고 내가 달라진다면 참 좋겠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부끄러운 글을 다시 볼 때마다 돌아보고, 반성하고, 개선하는 순환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런 삶이 글로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2017년 회고 2018년 계획

2017년 12월 28일

올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계획하자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그냥 먹고 지낸 이야기인데 다 쓰고 보니 두서없이 우울한 이야기가 많아서 올려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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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서는 가장 큰 변화가 있던 해였다. 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민경 씨와 평생을 함께할 약속을 모두 앞에서 했다. 어떤 고민이라도 이 사람 앞에만 가져가면 금방이라도 해결할 자신감이 생기는데 일과 비자의 문제로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어 아직은 함께 의논하는 데 어려움이 있긴 하다. 연초에는 이 일로 한국도 두 차례나 다녀와서 정신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양가 가족 모두 새로운 만남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사이에 서류 작업도 해야 했고 여러 가지 신경 쓸 부분이 알게 모르게 많았다. 그런 탓에 이 일 외에는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호주에서도 서류 작업을 기다렸던 때에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잦았고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또 떠오른다. 어느 나라든 서류 절차에 앞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역시 평정심이다.

큰 변화를 기다리면서 올 한 해는 정말 새로운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기존에 하던 일에서도 착실함을 잃었었다. 그만큼 회고를 쓰자고 마음 먹었을 때 내 부끄러운 부분을 얼마나 들춰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내 삶을 부지런히 측정하지도 않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도 잘 나질 않았다. 한 해 동안 개발도 블로그도, 심지어 트위터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글을 쓰는 일에 거리감마저 생겨서 무엇 하나 적어둔 일이 별로 없었다. 항상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했지만, 어느 하나 행동으로 연결되는 일이 없었다. 이상한모임 활동에서도 이런 내 개인적인 상황이 자꾸 영향을 줘 모두에게 피해가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자꾸 들어 피곤했다. 이런 기분이 시작부터 마지막 12월까지 들었고 슬랙을 포함한 커뮤니티 활동 모두 너무 힘들었다. 괴로운 나머지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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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오랜 기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새 회사로 옮기는 것으로 시작했고 대학에서 1년을 채웠다. 이전 글에서도 쓴 것처럼 대학 내 부서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다양한 업무를 접하고 있다. 큰 기업에서의 프로세스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사소한 것 하나도 서류 작업부터 시작하는 일은 한 해 꼬박하고도 어색하다. 합류 후 할 예정이던 첫 프로젝트는 내 코드 리뷰 후 비지니스 분석과 괴리가 지나치게 큰 상태라고 진단했는데 이미 예산을 많이 쓴 상태라서 그대로 접혀버렸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엎은 후에 반년 가까이 business as usual 만 했다. 그래서 연초에 들어왔는데 9월이나 되어서야 첫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Business Analyst와 Project Manager를 두고 일해본 경험은 처음이었고 정말 이렇게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후반부에는 비지니스가 요구사항을 구현 이후에야 바꾸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모두를 답답하게 만들긴 했지만 11월 말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실제 사용자에게 상당히 좋은 피드백도 받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기존 프로덕트에서의 사용성과 성능 문제를 대폭 해소한 덕분에 내년 로드맵에는 상용화에 대한 디스커버리 프로젝트도 잡혔다.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었지만, 이 과정 자체에서는 비지니스 탓에 스트레스가 좀 있어서 마냥 좋지만은 않은, 그런 복잡한 감정의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중간에 대규모 조직개편이 있어서 팀이 변경되었고 기존에 있던 많은 사람이 일을 정리했다. 나야 컨트랙터로 일하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휩쓸릴 필요는 없긴 했지만 사람 일이 그렇게 영향 안 받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개편 이후에 소속된 팀에서는 전에서의 팀과는 다르게 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와 같은 스택으로 일하던 사람도 그만둬버려서 PHP 개발자로는 유일하다. 모두가 자바 얘기하는데 혼자만 PHP하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소외감 같은 게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팀 바뀌고 나서야 알았는데 PHP는 미니 앱이라며 FTP로 배포하라 해놓곤 자기네는 젠킨스고 뭐고 리소스 펑펑 쓰고 있어서 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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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당시에는 프론트엔드가 75%고 25%는 PHP를 하게 될 것이라 했지만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끝낸 그 프로젝트에서는 그래도 ng1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내에서 프론트엔드 비중이 상당히 낮아서 요즘 버전으로 올리려는데도 말이 많았다. 말 많은 건 안 좋은 신호다. 일단 ng1도 제대로 된 코드로 작성되어 있지 않아 ng1 레퍼런스 프로젝트를 만든다 생각하고 개발했었다. 그런데 내년 초까지 하게 될 프로젝트는 순수하게 PHP인 데다 흔히 PHP로는 만들지 않는 그런 도구라서 별로 맡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다른 개발자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했을 텐데 나 혼자만 남았으니 다 떠안게 된 케이스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냥 이직하면 되는 시점이긴 한데 이 프로젝트를 12월에 맡게 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니 학교엔 사람 없고 사무실엔 대부분 휴가를 떠나 절반만 있고 나머지도 긴 긴 점심 먹으러 사라졌다. 업무를 물어볼 사람도, 그만둔다 만다 얘기할 사람까지도 다 휴가를 갔다. 12월은 없는 달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기서 평생 다닐 생각이라면 (그게 목표라면) 정말 좋은 회사다. 성장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최우선 고객은 대학이니 별로 경쟁도 없다. 가끔하는 구조조정에만 버텨내면, 즉 관리자 포지션으로 올라가지만 않는다면 나갈 일은 없을 것 같다. 15년, 20년 다닌 사람도 많은 것 보면 왠지 이해가 되는 환경이다. 게다가 학교는 다양한 시스템이 얽혀 있어서 도메인 지식을 많이 필요로 하더라. 게다가 수십 년의 데이터도 누적되어야 하기 때문에 끝없는 마이그레이션과 인티그레이션이 필요한 곳이라 한번 필수 인력이 되면 정말 나갈 일이 없다. 자체 데이터 센터에 모든 아카데믹 스태프의 이메일 아카이브만 몇 페타 저장되어 있단다. 쉽게 보일지 몰라도 그간 아이덴디티 체계도 여러 번 변경되었고 이메일 서버의 아키텍처도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니 쉽게 열어볼 수 없는 그런 아카이브인데 근 몇 년 데이터에 대해서만 o365로 접근 가능한 상태란다. 이런 역사를 모르면 영영 알 수 없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지난 구조조정에서 패키지 받고 우르르 나간 탓에 업무 공백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런 배경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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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다니던 회사는 하루에도 여러 웹사이트/웹서비스를 봐야 할 정도로 바쁘고 CS도 직간접적으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정말 바빴었다. 그래서 다음에 일하고 싶었던 곳은 웹서비스를 운영하는 그런 회사였다, 여기는 생각하던 그런 서비스 회사는 아니지만 오래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크게 배우고 있다. 이런 대규모의 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도입한 수많은 프로세스도 이해가 간다. 매번 서류에 치이고 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수많은 이해 관계 속에서 어떻게 비지니스를 끌고 나가는가, 하나의 프로젝트에 수많은 stakeholder를 두고 business engaging을 하고, 요구사항을 분석하고 프로젝트로 꾸리는 거하며, 서비스 제공자인 비지니스 입장에서 개발하다가도 노조와의 협약을 위반하지 않았는지 수시로 점검하는 부분들(새로운 기능은 물론 새로운 버튼을 넣는 것까지 문제가 될 수 있다는데), 그 와중에도 프로토타이핑으로 요구사항과 프로덕트의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이라든지, 최종 사용자를 모셔놓고 사용자 경험이 어떤지 테스트를 하는 등의 작업은 짧은 호흡의 회사에서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긴 스코프로 일을 하다 보니 버퍼로 주는 시간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대학이니 자유롭게 도서관도 사용할 수 있고 논문도 열람할 수 있었다. 궁금한 부분은 구글링으로도 해소할 수 있지만, 아카데믹 자료를 아무 때나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력적이다. 대학에 학적 있을 때는 논문 검색을 몇 번이나 이용했나 싶었는데 역시 필요가 앞서야 한다. 게다가 논문이란 단어가 주는 벽이 좀 허물어졌다. 블로그에나 쓸 만한 글을 논문으로 낸 경우도 많이 봤는데 리뷰가 된 글이라 그런지 몰라도 하나를 읽어도 이건 이렇구나, 저건 저렇구나 이해하기 좋았다. 그렇게 읽고 PoC도 짜보고 하면서 버퍼를 나름 알차게 쓰려고 노력했다.

이직할 생각이 문득 들어서 연락도 여럿 해보고 인터뷰도 봤다. 하지만 오래 다니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니까 이직할 동인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적극적으로 알아보지도 않았던 데다가 다른 스택으로 알아보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 받는 것보다 적었다. 그리고 학교 다니면 어떤 스택으로 더 하고 싶을지 모르는데 지금 덜컥 다른 경력 만들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학비를 모은다고 생각하면 많이 받는 곳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별로 건강하지 못한 결정을 한 것 같다.

그렇게 회사에서 바쁘게 페이퍼나 서류 읽고 미팅 갔다 서류하고 코딩 조금 하면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퇴근하면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고는 저녁 차려 먹고 넷플릭스 몇 편 보고 게임(Dota 2랑 인서전시) 한두 판 하면 잘 시간이 되었다.

지난해 낸 역서는 번역이 엉망이란 피드백을 몇 차례 들으니 출판사에도 죄송하고 원저자에게도, 구입한 분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런 탓에 번역 자체도 잘 안하게 되어 번역글도 별로 올리지 않았다. 블로그에도 뭐라고 글을 써야 할지 막막해서 아무런 글을 올리지 못했다. 분기 회고를 쓰고 좀 열심히 해봐야지 했는데 하나도 하질 않았다. 페이스북에도 글을 거의 안 올렸고 트위터에도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새로운 글도 책도 안 읽었다. 공부도 안했다. 리액트도 보겠다고 하곤 하나도 보지 않았고 한다고 했던 자격증 공부도 전혀 하질 않았다. 주말엔 자고 밀린 집안일 하기 바빴다. 가끔 텀블러에 짧은 글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했다. 사진도 재미없었고 영화도 지루했다. 토이프로젝트도 전혀 안 했고 이상한모임 활동도 열심히 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커뮤니티에서, 트위터에서 별 사소한 말에 다 상처받고 우울한 기분이 늘 반복되었다. 기분이 우울하면 트위터에서 맛있는 음식 먹는 사진만 봐도 와 나는 맛있는 것도 안먹고 뭐하고 사나 더 깊은 우울감이 생기고 그랬다. 아무런 활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면서도 실제로 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받았다. (쓰고보니 이상한데 정말 그랬다.) 그래도 매일 속으로는 이렇게 펑펑 시간 보내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계속 놀았다. 계속 이렇게 지내면 안 된다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스트레스는 계속 받았던 것 같다. 장작이 없으니 불은 점점 사그라졌고 일상이 참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열심히 지내면 되는데, 쉽게 생각할 순 있지만 그게 행동으로 옮겨지질 않았다. 번아웃이라고 말하긴 싫지만 그런 비슷한 상태로 올 한 해를 보냈다. 이런 바닥인 모습을 쓰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니 올해 내가 그랬다. 그래도 이번 달에는 좀 신경 써서 덜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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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민경 씨가 와서 지낸 시간, 함께 여행을 다닌 시간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처음으로 가본 시드니에서 오페라하우스를 다녀오기도 했고, 멜번에서도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고 고마웠는지. 폰에 저장된 사진을 다시 열어보면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감사하기만 하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다시 힘내고 열정있는 삶을 되찾아야 할 텐데. 함께 보낼 내년이 더 기대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새해에는 무엇보다 욕심을 좀 버리고 성취 가능한 수준에서 계획을 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늘 과하게 계획을 짜기도 했었고 매년 그냥 적고 보는 계획이 많았으니 이번엔 딱 세 가지만 해야지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기로 했다. 새해 전부터 시작하려고 리디북스에 사놓고 안 읽은 책부터 하나둘 읽어가고 있다. 여전히 읽으면서도 한쪽엔 트위터 열어 새로고침 하면서 괜히 우울한 기분을 유지하게 되는 것 같다. 왜 트위터만 보는데도 우울한 것일까. 그리고 멀티태스킹 그만해야 한다 정말.

글을 꾸준히 쓴다. 대신 블로그는 정리할까 고민하고 있다. 블로그도 있으면 좋긴 한데 블로그라는 양식에 이상하게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조회 수라든지 댓글이라든지 신경 안쓴다 해도 쓰이는 것 같다. 그래서 블로그와는 다른 환경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게다가 매달 나가는 고정비도 좀 줄이고 싶어서 좀 더 가볍거나 정적 사이트와 같은 형태로 바꿀까 생각하고 있다. 연말에 go 공부하고서 정적 페이지를 만드는 도구를 간단하게 만들어보고 있는데 아마 이걸 쓰지 않을까 고민한다. 연휴 동안 만들어서 적용해야지 했는데 붙여놓고 안 하니 좀 시큰둥해지긴 했다. 새로 만들면 좀 침울한 기분도 가시지 않을까. 뭐 이런 건 다 부수적인 부분이고 생각도 감정도 정리할 겸 글을 부지런히 쓰는 것에 중점을 뒀다. 책을 읽고서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을 지니려고 한다.

이제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영어 공부를 또 제대로 해야 한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토플 준비할까 생각하고 있다. 클래스만 들어도 문제없긴 하지만 뭔가 명확한 목표를 갖고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험 대비를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구체적으로는 차차 정해볼 생각이다.

개발에는 딱히 새로운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했다. 정서적인 충전을 좀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내년에는 생활 공간도 달라질 예정인데 이 변화를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열심히 생활했으면 좋겠다. 그 전까지는 지금 회사에서 계속 있을 생각인데 더 힘들다 느껴지면 아마 정리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좀 쉴 것 같다. 이직도 생각하긴 했지만 새로운 직장에 적응될 차에 또 그만두는 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한 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힘내자.

호주에서 첫 이직 후기

2017년 2월 11일

지난 월요일에 새로운 곳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멜버른 소재 S대학의 IT 부서에서 PHP/Frontend Developer로 일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결심하고 인터뷰 보고 합격하기까지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모두 이뤄졌다. 전 직장을 너무 오래 다녀서 그런지 새 직장에서 첫 주를 다니고 나서야 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Hawthorn, Victoria
새 사무실 계단에서 기차역이 보인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다닌 회사는 저스틴님을 만난 B사가 가장 먼저였지만 거기서는 2주 정도의 계약직이였고 이 레퍼런스로 취업하고 지난 달까지 다녔던 회사는 K사로 4년 10개월을 다녔다. 호주에서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다니기도 했고 지금까지 호주에 있을 수 있도록 비자도 모두 해준 고마운 회사라서 그만 두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전사적으로 여러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하고 직접 스크래치한 솔루션도 있어서 내 회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기억과 감정이 깃든 회사였다.

하지만 적은 인원으로 운용되는 에이전시에 운영/유지보수까지 양이 많아지다보니 본연의 업무보다 “급한” 일을 많이 하게 되서 점점 심적으로 힘들어졌었다. 그래도 작년에는 스스로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오랜 기간 노력을 해봤는데 내 스스로도 퍼포먼스가 떨어지고 집중도 안되는게 느껴져서 너무 괴로웠다. “급한” 일은 이상하게 “급한” 일을 이미 하고 있는데 더 “급한” 일이 나타나서 끝맺지 못한 일만 늘어나게 되는 것 같다. 그랬던 탓에 코드를 만드는 일 자체가 재미없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평소에는 퇴근하고 나면 이런 저런 코드도 만들고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 그냥 넷플릭스 보고 게임만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벌여놓은 일도 있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 기분도 들고, 블로그도 꾸준히 못했다. 그렇게 놀고도 다음날 출근하기 싫어서 일찍 자지도 않은 날이 반복되었다.

so sad
너무나 내 기분이라서 저장했던 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내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만 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들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는 작았고 모두 바쁘기도 하고 누구 붙잡아 얘기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이야기기도 했다. 그래서 멜버른 지인들을 커피와 점심/저녁을 핑계 삼아 만나 내 어려움을 늘 토로했는데 맨날 같은 말 하는 나를 만나 잘 챙겨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 이전에 너무 죄송하기만 하다.

작년 말에 이직을 결정하고 주변 분들에게 이직을 생각한다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었다. 그러던 중 저스틴님이 한 리쿠르터를 레퍼런스 해주셨는데 이력서를 보내고 하루 지나 인터뷰가 잡히게 되었다. 잔뜩 긴장하고 인터뷰를 갔고 php와 php security, angular, database, linux 기본적인 것들을 물어봤다. 다 일반적인 질문들이라 크게 어렵진 않았는데 데이터베이스 질문에 생각보다 막혀서 좀 조바심이 났다. 리쿠르터 분이 인터뷰 전에 “인터뷰이로 가는게 아니라 비지니스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고 대하라”는 얘기를 해줬는데 그런 각오로 인터뷰에 임했더니 좀 더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 끝에 질문할 때 프로젝트 요구사항이라든지 코드의 질이나 개발 환경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호주는 연말에 크리스마스에서 신년 사이 사무실 전체가 휴가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내 인터뷰가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이었다. 그날 오후에 리쿠르터한테 붙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도 아직 정식 오퍼가 오지 않아서 혹시나 싶어 조용히 지내다가 연휴가 끝나고 제대로 오퍼레터를 받을 수 있었다. (레퍼런스를 해주신 저스틴님과 지만님께 또 감사드린다.)

계약서를 확인해보니 일한 기간에 따라 노티스를 주게 되어 있어서 내 경우는 3주 노티스를 줘야 했다. 처음으로 사직서도 작성했다. Resignation letter template을 한참 검색하고 고민해서 썼다. (짜집기했다의 다른 표현.) 그렇게 써서 제출했더니 너무 갑작스럽다고 바로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고 3일 가량을 설득하려 했다. 그런 후 카운트 오퍼를 줬는데 그 사이 한참 흔들리긴 했지만 작년 한 해 힘들었던 기억도 있고 어짜피 한번 말하고 나면 이전과 같은 관계가 될 수 없다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오퍼를 거절하고 다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3주 정리 기간동안 인수인계 기간을 거쳤다. 마지막 날은 오랜 기간 다녀서 기분이 먹먹하긴 했지만 마지막이란 생각에 너무 행복했고 퇴근 후에도 너무 행복했고 다음 월요일 출근 안해서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잘 그만 뒀구나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고 새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대학교로 출근하는 기분도 신선하고 동네 분위기도 사뭇 달라서 아직 어색하지만 팀원도 좋고 좀 더 체계적인 환경에서 개발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 (대학가라서 점심 먹을 곳이 참 많다!) 첫 주라서 기존 코드를 읽고 업무 파악하고 부트스트랩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조만간 프로젝트가 시작될 예정이라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있다. 이전 조직에 비해 커뮤니케이션과 문서화가 월등히 많아서 개발 자체보다는 영어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차근차근 준비해나가야겠다.

개발자가 아닌 개발자

2017년 2월 2일

얼마 전에 okky에 웹 개발자도 개발자라고 할 수 있나요라는 글이 올라왔었다. 원문을 보기 전에 수많은 분들의 반응을 먼저 봐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볍게 읽고 지나갔다. 이직으로 인한 인수인계에, 책 마무리 작업에, 이상한모임까지 겹쳐 자는 시간 외에는 정말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사실 코더랑 프로그래머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종종 봐왔기 때문에 이런 글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이 글이 계속 생각이 났다.

의외로 복사 붙여넣기 코드가 저평가 받는다. 붙여 넣어도 돌아갈 만큼 발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수반되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3분 카레를 데워 먹는다고 그게 음식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포장 기술도, 가열 도구의 발전도 저변에 깔려 있다. 그리고 공개된 조리법을 사용한다고 요리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파인 다이닝에서 요리하는 셰프가 스스로 레시피를 개발해서 요리한다 한들 그 사실을 동네 중국집 요리사를 요리사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된다. 솔직히 이런 부분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구차하게 느껴진다.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은 억대 연봉자, 부당 대우에 관한 이야기다. 이 부분은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산업 전반에서 필요한, 필수적인 논의다. 그 분야에서 대가가 되어야만 발언권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장을 저해하는 요소다. 억대 연봉자가 늘어나면 지금 시작하는 사람들도 더 좋은 연봉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잘 못하는 사람이 좋은 대우를 받는다면 잘하는 사람은 지금보다도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낙수효과고 다른 하나는 분수효과에 대한 이야기로 어느 쪽이든 오늘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당한건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연대해야 한다. 게임개발자연대와 같은 활동이 더 많아져야 한다. 적어도 엉뚱한 전제로 사다리를 걷어차지 말아야 한다.

오늘 점심은 풀스택 음식점 김밥천국에서 먹고 싶다.

첫 도서 번역에서 배운 점

2016년 12월 8일

2016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상투적이지만 어째 한해 한해 더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이다.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경험을 글로 정리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저지른 일이 많다보니 한번에 풀어내기 쉽지 않은 탓도 있는 것 같다. 이상한모임에서도 올해 배운 것이라는 주제로 대림절 달력이 진행되고 있는데 달력에 매일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더 미루지 말고 조금이라도 정리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올해 했던 일 중 하나가 도서 번역이었다. 이 글은 번역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한 포스트다. 번역을 하기 전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부분도 실제 과정에서 겪기도 했고 생각과 전혀 달랐던 부분도 있었다. 출판이나 번역 쪽에 오래 계셨던 분이 읽기에는 너무 사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겪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진행 과정

올해 2월에 출판사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받았다. Practical Vim이라는 도서 번역 의뢰였다. 2015년 말에 올렸던 글이 널리 퍼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블로그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전문적으로 번역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블로그에 작게나마 글을 번역해서 자주 올리고 있어서 제안이 너무 반가웠다. 특히 Vim은 늘 사용하지만 제대로 사용한다는 자신이 없었는데 이 책을 번역하면 그 가려움도 긁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번역에 대한 질이나 속도를 정확하게 모르기도 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안해본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책에 대해서 뒷얘기도 많이 들었던 터라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블로그야 번역 글이 잘못되었다면 수정하거나 다듬거나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데 책은 전혀 그러지 못하니 겁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하면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까 싶어서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출판사에서도 계약 전에 일정 분량을 번역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번역 품질이나 속도를 가늠하기 위한, 일종의 면접이였다. 그렇게 여러 장 분량을 번역해서 며칠 후 메일로 발송했다. 몇 차례 추가적으로 다듬는 과정을 거친 후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초벌 번역은 6월에 끝났고 첫 교정은 9월에, 두 번째는 11월 초에 마무리했다. 초반에 번역했던 부분과 후반에 번역한 부분을 비교하면 확실히 후반부가 자연스러웠다. 진행하는 동안 문장력이 상승했는지 어쩐건지 모르겠지만 품질이 일관적이지 않았던 탓에 편집자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려웠던 부분과 배운 점

모든 과정이 도구와의 씨름이었다. 초벌 번역에서는 Vim을 사용해서 작성했지만 원문의 다양한 양식을 반영하는데 쉽지 않았다. 첫 교정에서는 구글독스를 쓰려고 했는데 페이지 분량이 조금만 많아도 속도가 너무 느려서 윈도 노트북을 장만하고 MS 오피스 워드로 전환했다. 워드도 분량이 많아지면 상당히 느려지고 굳을 때가 생각보다 많았다. 작업 과정 중 도구 때문에 고민 안했던 적이 없었는데 디자인으로 옮겨진 후에 PDF 상에서 교정을 볼 때 가장 편하게 느껴졌다.

용어 번역이 쉽지 않았다. 사전적 의미로 옮기는 방식은 가장 쉽지만 기능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 오히려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하는 용어는 아닌지 계속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두루 사용되는 용어로 번역해야 할 지, 아니면 음차로 표기를 할 지 단어 하나하나 넘어가기 쉽지 않았다. Vim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는 참고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어려웠다.

번역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도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든다. 키워드는 동일한 용어로 번역해야 하는데 영어다보니 이게 키워드로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일반 표현으로 작성한 것인지 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번역을 진행하면서 용어 사전을 만드는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책 자체가 팁이 나열된 방식이고 각 팁마다 연결된 팁이 언급되어 있어서 그때그때 키워드를 찾는 과정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교정에서 많이 후회했다. 생각보다 번역 기간은 길어졌고 그 기간동안 기억이 많이 희미해져서 오가며 찾아보는 과정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긴 글을 번역해본 경험이 없어서 시간 배분이 쉽지 않았다. 각 장, 파트마다 “대략적인” 기간을 산정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시작하기 전에 분량과 내용의 난이도를 판단해서 일별로 작업량을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업 번역가가 아니라면 이 과정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책에서 나눠진 팁 단위로 목표를 잡고 진행했는데 각 장이나 팁마다 분량이 각각이라 생각보다 목표에 맞춰 진행하기 어려웠다. 쪽으로 나눠서 하는게 훨씬 편했고 작업 분량 측정이나 목표 달성하는데 훨씬 쉬웠다.

번역에 신경썼던 점

블로그에 번역글을 올리는 것과는 확실히 무게감에서 차이가 있어서 교정에 노력을 많이 했다. 볼 때마다 말도 안되는 문장이 자꾸 보여서 겁이 날 지경이다. 번역과 교정에서 지키려고 노력한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내 스스로 역서를 읽을 때 불편하게 느꼈던 표현이라서 계속 염두하고 진행했다.

  • 피동/사동 표현은 최소로 사용하려고 했다. 피동이 아니면 정말 어색한 경우 외에는 전부 능동으로 적었다. “비주얼 모드에서 영역 선택 기능이 제공된다.” 보다는 “비주얼 모드에서 영역 선택 기능을 제공한다.” 처럼 작성했다.
  • 대명사는 좀 더 명확하게 하고 싶었다. It, this 같은 대명사가 반복되는데 “이 플러그인은”, “이 기능은” 식으로 옮겼다.
  • 복수형 표현에 주의했다. Some of Vim’s commands are 식은 “Vim의 명령들 중에는” 보다 “Vim의 명령 중에는” 처럼 작성했다.

번역 과정 중에 번역에 관한 책을 몇 권 알게 되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번역 사이사이 베타리딩, 이상한모임 행사, 회사일, 호주 체류 관련 업무 등등 수많은 일이 있어 도저히 읽을 여유가 없었다. 위시리스트에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각각 읽은 분들 후기를 보면 읽고 나서 번역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며 적어뒀다.

  •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번역의 탄생
  •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 갈등하는 번역
  • 문장 기술

읽지도 않은 책 목록을 올리는게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넣었다. 연말 휴가 기간 동안에 마련할 수 있는 책은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트위터에서 번역 질이 안좋은 책은 어떤 혹독한 대우를 받고 사는지 자주 봐서 이 책으로 불로장생을 실현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더군다나 책에 역자로 내 이름이 올라간다고 해서 나만의 책인 것이 아니라 교정부터 디자인, 출력 등 내가 알기도 모르기도 하는 수많은 손이 함께 한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어 밥이 넘어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미 원고가 내 손을 떠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런 기분이 든다. 책을 실물로 보면 좀 홀가분해질지, 그때가 되어봐야 알 것 같다.

그리고 한편 뿌듯했던 부분은 블로그에 계속 올린 번역을 보고 연락을 받았다는 점이다. 기술적인 내용이나 유익한 글은 번역하며 꼼꼼하게 보고 더 오래 기억하고 싶기도 했고 같이 읽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번역을 올렸었다. 이런 번역이 일종의 포트폴리오가 되리라고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꼼꼼하게 글을 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