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계획하자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그냥 먹고 지낸 이야기인데 다 쓰고 보니 두서없이 우울한 이야기가 많아서 올려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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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서는 가장 큰 변화가 있던 해였다. 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민경 씨와 평생을 함께할 약속을 모두 앞에서 했다. 어떤 고민이라도 이 사람 앞에만 가져가면 금방이라도 해결할 자신감이 생기는데 일과 비자의 문제로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어 아직은 함께 의논하는 데 어려움이 있긴 하다. 연초에는 이 일로 한국도 두 차례나 다녀와서 정신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양가 가족 모두 새로운 만남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사이에 서류 작업도 해야 했고 여러 가지 신경 쓸 부분이 알게 모르게 많았다. 그런 탓에 이 일 외에는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호주에서도 서류 작업을 기다렸던 때에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잦았고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또 떠오른다. 어느 나라든 서류 절차에 앞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역시 평정심이다.
큰 변화를 기다리면서 올 한 해는 정말 새로운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기존에 하던 일에서도 착실함을 잃었었다. 그만큼 회고를 쓰자고 마음 먹었을 때 내 부끄러운 부분을 얼마나 들춰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내 삶을 부지런히 측정하지도 않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도 잘 나질 않았다. 한 해 동안 개발도 블로그도, 심지어 트위터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글을 쓰는 일에 거리감마저 생겨서 무엇 하나 적어둔 일이 별로 없었다. 항상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했지만, 어느 하나 행동으로 연결되는 일이 없었다. 이상한모임 활동에서도 이런 내 개인적인 상황이 자꾸 영향을 줘 모두에게 피해가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자꾸 들어 피곤했다. 이런 기분이 시작부터 마지막 12월까지 들었고 슬랙을 포함한 커뮤니티 활동 모두 너무 힘들었다. 괴로운 나머지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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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오랜 기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새 회사로 옮기는 것으로 시작했고 대학에서 1년을 채웠다. 이전 글에서도 쓴 것처럼 대학 내 부서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다양한 업무를 접하고 있다. 큰 기업에서의 프로세스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사소한 것 하나도 서류 작업부터 시작하는 일은 한 해 꼬박하고도 어색하다. 합류 후 할 예정이던 첫 프로젝트는 내 코드 리뷰 후 비지니스 분석과 괴리가 지나치게 큰 상태라고 진단했는데 이미 예산을 많이 쓴 상태라서 그대로 접혀버렸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엎은 후에 반년 가까이 business as usual 만 했다. 그래서 연초에 들어왔는데 9월이나 되어서야 첫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Business Analyst와 Project Manager를 두고 일해본 경험은 처음이었고 정말 이렇게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후반부에는 비지니스가 요구사항을 구현 이후에야 바꾸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모두를 답답하게 만들긴 했지만 11월 말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실제 사용자에게 상당히 좋은 피드백도 받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기존 프로덕트에서의 사용성과 성능 문제를 대폭 해소한 덕분에 내년 로드맵에는 상용화에 대한 디스커버리 프로젝트도 잡혔다.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었지만, 이 과정 자체에서는 비지니스 탓에 스트레스가 좀 있어서 마냥 좋지만은 않은, 그런 복잡한 감정의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중간에 대규모 조직개편이 있어서 팀이 변경되었고 기존에 있던 많은 사람이 일을 정리했다. 나야 컨트랙터로 일하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휩쓸릴 필요는 없긴 했지만 사람 일이 그렇게 영향 안 받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개편 이후에 소속된 팀에서는 전에서의 팀과는 다르게 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와 같은 스택으로 일하던 사람도 그만둬버려서 PHP 개발자로는 유일하다. 모두가 자바 얘기하는데 혼자만 PHP하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소외감 같은 게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팀 바뀌고 나서야 알았는데 PHP는 미니 앱이라며 FTP로 배포하라 해놓곤 자기네는 젠킨스고 뭐고 리소스 펑펑 쓰고 있어서 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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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당시에는 프론트엔드가 75%고 25%는 PHP를 하게 될 것이라 했지만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끝낸 그 프로젝트에서는 그래도 ng1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내에서 프론트엔드 비중이 상당히 낮아서 요즘 버전으로 올리려는데도 말이 많았다. 말 많은 건 안 좋은 신호다. 일단 ng1도 제대로 된 코드로 작성되어 있지 않아 ng1 레퍼런스 프로젝트를 만든다 생각하고 개발했었다. 그런데 내년 초까지 하게 될 프로젝트는 순수하게 PHP인 데다 흔히 PHP로는 만들지 않는 그런 도구라서 별로 맡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다른 개발자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했을 텐데 나 혼자만 남았으니 다 떠안게 된 케이스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냥 이직하면 되는 시점이긴 한데 이 프로젝트를 12월에 맡게 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니 학교엔 사람 없고 사무실엔 대부분 휴가를 떠나 절반만 있고 나머지도 긴 긴 점심 먹으러 사라졌다. 업무를 물어볼 사람도, 그만둔다 만다 얘기할 사람까지도 다 휴가를 갔다. 12월은 없는 달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기서 평생 다닐 생각이라면 (그게 목표라면) 정말 좋은 회사다. 성장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최우선 고객은 대학이니 별로 경쟁도 없다. 가끔하는 구조조정에만 버텨내면, 즉 관리자 포지션으로 올라가지만 않는다면 나갈 일은 없을 것 같다. 15년, 20년 다닌 사람도 많은 것 보면 왠지 이해가 되는 환경이다. 게다가 학교는 다양한 시스템이 얽혀 있어서 도메인 지식을 많이 필요로 하더라. 게다가 수십 년의 데이터도 누적되어야 하기 때문에 끝없는 마이그레이션과 인티그레이션이 필요한 곳이라 한번 필수 인력이 되면 정말 나갈 일이 없다. 자체 데이터 센터에 모든 아카데믹 스태프의 이메일 아카이브만 몇 페타 저장되어 있단다. 쉽게 보일지 몰라도 그간 아이덴디티 체계도 여러 번 변경되었고 이메일 서버의 아키텍처도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니 쉽게 열어볼 수 없는 그런 아카이브인데 근 몇 년 데이터에 대해서만 o365로 접근 가능한 상태란다. 이런 역사를 모르면 영영 알 수 없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지난 구조조정에서 패키지 받고 우르르 나간 탓에 업무 공백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런 배경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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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다니던 회사는 하루에도 여러 웹사이트/웹서비스를 봐야 할 정도로 바쁘고 CS도 직간접적으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정말 바빴었다. 그래서 다음에 일하고 싶었던 곳은 웹서비스를 운영하는 그런 회사였다, 여기는 생각하던 그런 서비스 회사는 아니지만 오래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크게 배우고 있다. 이런 대규모의 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도입한 수많은 프로세스도 이해가 간다. 매번 서류에 치이고 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수많은 이해 관계 속에서 어떻게 비지니스를 끌고 나가는가, 하나의 프로젝트에 수많은 stakeholder를 두고 business engaging을 하고, 요구사항을 분석하고 프로젝트로 꾸리는 거하며, 서비스 제공자인 비지니스 입장에서 개발하다가도 노조와의 협약을 위반하지 않았는지 수시로 점검하는 부분들(새로운 기능은 물론 새로운 버튼을 넣는 것까지 문제가 될 수 있다는데), 그 와중에도 프로토타이핑으로 요구사항과 프로덕트의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이라든지, 최종 사용자를 모셔놓고 사용자 경험이 어떤지 테스트를 하는 등의 작업은 짧은 호흡의 회사에서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긴 스코프로 일을 하다 보니 버퍼로 주는 시간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대학이니 자유롭게 도서관도 사용할 수 있고 논문도 열람할 수 있었다. 궁금한 부분은 구글링으로도 해소할 수 있지만, 아카데믹 자료를 아무 때나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력적이다. 대학에 학적 있을 때는 논문 검색을 몇 번이나 이용했나 싶었는데 역시 필요가 앞서야 한다. 게다가 논문이란 단어가 주는 벽이 좀 허물어졌다. 블로그에나 쓸 만한 글을 논문으로 낸 경우도 많이 봤는데 리뷰가 된 글이라 그런지 몰라도 하나를 읽어도 이건 이렇구나, 저건 저렇구나 이해하기 좋았다. 그렇게 읽고 PoC도 짜보고 하면서 버퍼를 나름 알차게 쓰려고 노력했다.
이직할 생각이 문득 들어서 연락도 여럿 해보고 인터뷰도 봤다. 하지만 오래 다니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니까 이직할 동인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적극적으로 알아보지도 않았던 데다가 다른 스택으로 알아보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 받는 것보다 적었다. 그리고 학교 다니면 어떤 스택으로 더 하고 싶을지 모르는데 지금 덜컥 다른 경력 만들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학비를 모은다고 생각하면 많이 받는 곳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별로 건강하지 못한 결정을 한 것 같다.
그렇게 회사에서 바쁘게 페이퍼나 서류 읽고 미팅 갔다 서류하고 코딩 조금 하면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퇴근하면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고는 저녁 차려 먹고 넷플릭스 몇 편 보고 게임(Dota 2랑 인서전시) 한두 판 하면 잘 시간이 되었다.
퇴근 후 커밋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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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 좋겠지만 도타2로 만든 잔디밭 ? pic.twitter.com/ZP7jD315L3— 용균 (@haruair) December 25, 2017
지난해 낸 역서는 번역이 엉망이란 피드백을 몇 차례 들으니 출판사에도 죄송하고 원저자에게도, 구입한 분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런 탓에 번역 자체도 잘 안하게 되어 번역글도 별로 올리지 않았다. 블로그에도 뭐라고 글을 써야 할지 막막해서 아무런 글을 올리지 못했다. 분기 회고를 쓰고 좀 열심히 해봐야지 했는데 하나도 하질 않았다. 페이스북에도 글을 거의 안 올렸고 트위터에도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새로운 글도 책도 안 읽었다. 공부도 안했다. 리액트도 보겠다고 하곤 하나도 보지 않았고 한다고 했던 자격증 공부도 전혀 하질 않았다. 주말엔 자고 밀린 집안일 하기 바빴다. 가끔 텀블러에 짧은 글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했다. 사진도 재미없었고 영화도 지루했다. 토이프로젝트도 전혀 안 했고 이상한모임 활동도 열심히 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커뮤니티에서, 트위터에서 별 사소한 말에 다 상처받고 우울한 기분이 늘 반복되었다. 기분이 우울하면 트위터에서 맛있는 음식 먹는 사진만 봐도 와 나는 맛있는 것도 안먹고 뭐하고 사나 더 깊은 우울감이 생기고 그랬다. 아무런 활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면서도 실제로 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받았다. (쓰고보니 이상한데 정말 그랬다.) 그래도 매일 속으로는 이렇게 펑펑 시간 보내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계속 놀았다. 계속 이렇게 지내면 안 된다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스트레스는 계속 받았던 것 같다. 장작이 없으니 불은 점점 사그라졌고 일상이 참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열심히 지내면 되는데, 쉽게 생각할 순 있지만 그게 행동으로 옮겨지질 않았다. 번아웃이라고 말하긴 싫지만 그런 비슷한 상태로 올 한 해를 보냈다. 이런 바닥인 모습을 쓰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니 올해 내가 그랬다. 그래도 이번 달에는 좀 신경 써서 덜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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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민경 씨가 와서 지낸 시간, 함께 여행을 다닌 시간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처음으로 가본 시드니에서 오페라하우스를 다녀오기도 했고, 멜번에서도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고 고마웠는지. 폰에 저장된 사진을 다시 열어보면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감사하기만 하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다시 힘내고 열정있는 삶을 되찾아야 할 텐데. 함께 보낼 내년이 더 기대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새해에는 무엇보다 욕심을 좀 버리고 성취 가능한 수준에서 계획을 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늘 과하게 계획을 짜기도 했었고 매년 그냥 적고 보는 계획이 많았으니 이번엔 딱 세 가지만 해야지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기로 했다. 새해 전부터 시작하려고 리디북스에 사놓고 안 읽은 책부터 하나둘 읽어가고 있다. 여전히 읽으면서도 한쪽엔 트위터 열어 새로고침 하면서 괜히 우울한 기분을 유지하게 되는 것 같다. 왜 트위터만 보는데도 우울한 것일까. 그리고 멀티태스킹 그만해야 한다 정말.
글을 꾸준히 쓴다. 대신 블로그는 정리할까 고민하고 있다. 블로그도 있으면 좋긴 한데 블로그라는 양식에 이상하게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조회 수라든지 댓글이라든지 신경 안쓴다 해도 쓰이는 것 같다. 그래서 블로그와는 다른 환경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게다가 매달 나가는 고정비도 좀 줄이고 싶어서 좀 더 가볍거나 정적 사이트와 같은 형태로 바꿀까 생각하고 있다. 연말에 go 공부하고서 정적 페이지를 만드는 도구를 간단하게 만들어보고 있는데 아마 이걸 쓰지 않을까 고민한다. 연휴 동안 만들어서 적용해야지 했는데 붙여놓고 안 하니 좀 시큰둥해지긴 했다. 새로 만들면 좀 침울한 기분도 가시지 않을까. 뭐 이런 건 다 부수적인 부분이고 생각도 감정도 정리할 겸 글을 부지런히 쓰는 것에 중점을 뒀다. 책을 읽고서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을 지니려고 한다.
이제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영어 공부를 또 제대로 해야 한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토플 준비할까 생각하고 있다. 클래스만 들어도 문제없긴 하지만 뭔가 명확한 목표를 갖고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험 대비를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구체적으로는 차차 정해볼 생각이다.
개발에는 딱히 새로운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했다. 정서적인 충전을 좀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내년에는 생활 공간도 달라질 예정인데 이 변화를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열심히 생활했으면 좋겠다. 그 전까지는 지금 회사에서 계속 있을 생각인데 더 힘들다 느껴지면 아마 정리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좀 쉴 것 같다. 이직도 생각하긴 했지만 새로운 직장에 적응될 차에 또 그만두는 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한 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