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에 대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지내왔고 실제로도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서 처음엔 좋은 주제라고 느꼈는데 막상 작성하려고 하니 최근에는 오랜 시간을 몰입해본 기억이 없었다. 쉽게 몰입했던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요 며칠은 퇴근하고 집중적으로 번역 글을 올리는데 시간을 사용했다.

몰입을 방해하는 환경

나는 몰입에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흐름을 끊는 방해 요소가 많아졌다. 한두 번 정도야 다음 몰입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이 상황이 반복되면 그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반복적으로 집중이 틀어지면 또 집중이 흐트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몸이 무의식적으로 예상하고 있어서 그런지 다시 몰입 상태로 진입하기 힘들다. 그러면 일도 지루하게 느껴지고 재미도 없어진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주변 환경에 대해 배로 민감해진다. 누군가의 대화, 문 여닫는 소음, 전화벨 소리, 발소리, 기침 소리, 심지어는 작은 노티피케이션 하나에도 방해로 느껴지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 악순환에 빠진다. 작은 자극에도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공간을 개선하거나, 공간을 탈출하거나. 참으면 본인만 손해다. 그래서 요즘은 몰입하는 것 자체보다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몰입의 대상과 조건

당연한 점인지 몰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을 잘한다. 재밌는 일을 좋아한다. 처음 하거나 아직 익숙지 않아서 서툰 일을 재밌어한다. 숙련도가 늘어나는 반복 작업도 재밌다. 없는 것을 만드는 작업을 재밌다. 이미 있는 것을 개선하는 작업도 재밌다. 내가 단순해서 그런지 웬만하면 다 재미있어한다.

재미있으려면 호기심이 생겨야 하고 호기심이 있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목표가 된다. 급박한 기일을 가진 데드라인을 정하고 달리는 것도 좋지만 이런 긴장감이 반복 되다보면 결국 고무줄은 늘어나고 사람은 지치고 여유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쉴 때 확실하게 쉬지 않으면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반복되는 데드라인에도 지치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내가 생각하는 범위 이상으로 여유의 크기가 남다르게 큰 사람이거나 쉴 때 엄청나게 잘 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내적 요인, 외적 요인 가릴 것 없이 쉽게 몰입해서 과정을 즐긴다.

내게 몰입에 도움이 되는 공간은 주변은 어둡지만 내 손 닿는 곳은 밝은, 그리고 밀폐된 느낌이 있는 공간이다. 즉 도서관 열람실 같은 분위기에서 쉽게 몰입한다. 오랫동안 집중해서 무엇인가 한 기억은 모두 그와 비슷한 공간이라 그런지 그와 같은 환경에서 몰입이 더 잘된다. 어쩌면 학습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듣거나 TV를 보면서는 절대 안된다. 가사 없는 곡은 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집중이 잘되는 편이다. 화이트 노이즈 같은 에어컨 돌아가는 소음이나 컴퓨터 돌아가는 소음 있는 공간도 잠만 잘 오고 집중에 방해된다.

소음 얘기하다 생각났는데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방을 정리하는 사람과 방을 정리하지 않는 사람인데 전자는 뭘 해도 바로 정리하는 타입이고 후자는 정리를 아예 하지 않거나 어쩌다 한번 정리하는 타입이다. 나는 후자인 편인데 어쩌면 물건이나 옷이 많아서 소음을 줄여주는 차음재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1 아무튼 나에겐 번잡스러운 공간도 집중에 도움이 된다.

몰입 해야 하나

몰입의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 몰입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상관 없이 몰입이라는 경험 자체에 중독성이 있다. 성취로 인한 기쁨도 있지만 내가 얼마나 집중해서 결과를 만들었는지도 만족의 척도가 된다. 결과는 썩 좋지 않더라도 몰입하고 나면 “괜찮아, 나는 꽤 즐겁게 한 걸” 하고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다. 힘들 수 있는 과정을 즐겁게 수행하는 비결이 된다.

반대로 몰입에서 오는 만족감 때문에 몰입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일을 잘 끝내고 나서도 몰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허전한 기분에 빠지거나 일을 망쳤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 이것도 은근 스트레스다. 몰입은 필수가 아니다.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인데 몰입 자체에 집착하면 강박증세만 심화된다.

몰입은 자신의 환경을 돌아봐야 한다는 신호다. 몰입이 안되는 상황을 자신 탓이라 생각하면 그건 해결될 수 없는 방식이다. 사람은 다 다르고 다 다른 방식의 몰입 트리거를 가지고 있을 텐데 다 같은 방법으로 몰입할 수 있을까. 누구는 너저분한 책상에서 집중이 잘 되고 누구는 깨끗한 책상에서 집중이 잘 된다. 몰입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하기보다 어떤 환경에서 내 여유를 챙기고 충전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어떤 환경에서 몰입할 수 있는지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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