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상투적이지만 어째 한해 한해 더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이다.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경험을 글로 정리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저지른 일이 많다보니 한번에 풀어내기 쉽지 않은 탓도 있는 것 같다. 이상한모임에서도 올해 배운 것이라는 주제로 대림절 달력이 진행되고 있는데 달력에 매일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더 미루지 말고 조금이라도 정리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올해 했던 일 중 하나가 도서 번역이었다. 이 글은 번역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한 포스트다. 번역을 하기 전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부분도 실제 과정에서 겪기도 했고 생각과 전혀 달랐던 부분도 있었다. 출판이나 번역 쪽에 오래 계셨던 분이 읽기에는 너무 사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겪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진행 과정
올해 2월에 출판사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받았다. Practical Vim이라는 도서 번역 의뢰였다. 2015년 말에 올렸던 글이 널리 퍼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블로그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전문적으로 번역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블로그에 작게나마 글을 번역해서 자주 올리고 있어서 제안이 너무 반가웠다. 특히 Vim은 늘 사용하지만 제대로 사용한다는 자신이 없었는데 이 책을 번역하면 그 가려움도 긁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번역에 대한 질이나 속도를 정확하게 모르기도 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안해본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책에 대해서 뒷얘기도 많이 들었던 터라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블로그야 번역 글이 잘못되었다면 수정하거나 다듬거나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데 책은 전혀 그러지 못하니 겁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하면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까 싶어서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출판사에서도 계약 전에 일정 분량을 번역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번역 품질이나 속도를 가늠하기 위한, 일종의 면접이였다. 그렇게 여러 장 분량을 번역해서 며칠 후 메일로 발송했다. 몇 차례 추가적으로 다듬는 과정을 거친 후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초벌 번역은 6월에 끝났고 첫 교정은 9월에, 두 번째는 11월 초에 마무리했다. 초반에 번역했던 부분과 후반에 번역한 부분을 비교하면 확실히 후반부가 자연스러웠다. 진행하는 동안 문장력이 상승했는지 어쩐건지 모르겠지만 품질이 일관적이지 않았던 탓에 편집자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려웠던 부분과 배운 점
모든 과정이 도구와의 씨름이었다. 초벌 번역에서는 Vim을 사용해서 작성했지만 원문의 다양한 양식을 반영하는데 쉽지 않았다. 첫 교정에서는 구글독스를 쓰려고 했는데 페이지 분량이 조금만 많아도 속도가 너무 느려서 윈도 노트북을 장만하고 MS 오피스 워드로 전환했다. 워드도 분량이 많아지면 상당히 느려지고 굳을 때가 생각보다 많았다. 작업 과정 중 도구 때문에 고민 안했던 적이 없었는데 디자인으로 옮겨진 후에 PDF 상에서 교정을 볼 때 가장 편하게 느껴졌다.
용어 번역이 쉽지 않았다. 사전적 의미로 옮기는 방식은 가장 쉽지만 기능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 오히려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하는 용어는 아닌지 계속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두루 사용되는 용어로 번역해야 할 지, 아니면 음차로 표기를 할 지 단어 하나하나 넘어가기 쉽지 않았다. Vim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는 참고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어려웠다.
번역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도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든다. 키워드는 동일한 용어로 번역해야 하는데 영어다보니 이게 키워드로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일반 표현으로 작성한 것인지 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번역을 진행하면서 용어 사전을 만드는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책 자체가 팁이 나열된 방식이고 각 팁마다 연결된 팁이 언급되어 있어서 그때그때 키워드를 찾는 과정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교정에서 많이 후회했다. 생각보다 번역 기간은 길어졌고 그 기간동안 기억이 많이 희미해져서 오가며 찾아보는 과정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긴 글을 번역해본 경험이 없어서 시간 배분이 쉽지 않았다. 각 장, 파트마다 “대략적인” 기간을 산정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시작하기 전에 분량과 내용의 난이도를 판단해서 일별로 작업량을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업 번역가가 아니라면 이 과정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책에서 나눠진 팁 단위로 목표를 잡고 진행했는데 각 장이나 팁마다 분량이 각각이라 생각보다 목표에 맞춰 진행하기 어려웠다. 쪽으로 나눠서 하는게 훨씬 편했고 작업 분량 측정이나 목표 달성하는데 훨씬 쉬웠다.
번역에 신경썼던 점
블로그에 번역글을 올리는 것과는 확실히 무게감에서 차이가 있어서 교정에 노력을 많이 했다. 볼 때마다 말도 안되는 문장이 자꾸 보여서 겁이 날 지경이다. 번역과 교정에서 지키려고 노력한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내 스스로 역서를 읽을 때 불편하게 느꼈던 표현이라서 계속 염두하고 진행했다.
- 피동/사동 표현은 최소로 사용하려고 했다. 피동이 아니면 정말 어색한 경우 외에는 전부 능동으로 적었다. “비주얼 모드에서 영역 선택 기능이 제공된다.” 보다는 “비주얼 모드에서 영역 선택 기능을 제공한다.” 처럼 작성했다.
- 대명사는 좀 더 명확하게 하고 싶었다. It, this 같은 대명사가 반복되는데 “이 플러그인은”, “이 기능은” 식으로 옮겼다.
- 복수형 표현에 주의했다. Some of Vim’s commands are 식은 “Vim의 명령들 중에는” 보다 “Vim의 명령 중에는” 처럼 작성했다.
번역 과정 중에 번역에 관한 책을 몇 권 알게 되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번역 사이사이 베타리딩, 이상한모임 행사, 회사일, 호주 체류 관련 업무 등등 수많은 일이 있어 도저히 읽을 여유가 없었다. 위시리스트에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각각 읽은 분들 후기를 보면 읽고 나서 번역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며 적어뒀다.
-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번역의 탄생
-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 갈등하는 번역
- 문장 기술
읽지도 않은 책 목록을 올리는게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넣었다. 연말 휴가 기간 동안에 마련할 수 있는 책은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트위터에서 번역 질이 안좋은 책은 어떤 혹독한 대우를 받고 사는지 자주 봐서 이 책으로 불로장생을 실현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더군다나 책에 역자로 내 이름이 올라간다고 해서 나만의 책인 것이 아니라 교정부터 디자인, 출력 등 내가 알기도 모르기도 하는 수많은 손이 함께 한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어 밥이 넘어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미 원고가 내 손을 떠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런 기분이 든다. 책을 실물로 보면 좀 홀가분해질지, 그때가 되어봐야 알 것 같다.
그리고 한편 뿌듯했던 부분은 블로그에 계속 올린 번역을 보고 연락을 받았다는 점이다. 기술적인 내용이나 유익한 글은 번역하며 꼼꼼하게 보고 더 오래 기억하고 싶기도 했고 같이 읽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번역을 올렸었다. 이런 번역이 일종의 포트폴리오가 되리라고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꼼꼼하게 글을 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