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에 새로운 곳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멜버른 소재 S대학의 IT 부서에서 PHP/Frontend Developer로 일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결심하고 인터뷰 보고 합격하기까지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모두 이뤄졌다. 전 직장을 너무 오래 다녀서 그런지 새 직장에서 첫 주를 다니고 나서야 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다닌 회사는 저스틴님을 만난 B사가 가장 먼저였지만 거기서는 2주 정도의 계약직이였고 이 레퍼런스로 취업하고 지난 달까지 다녔던 회사는 K사로 4년 10개월을 다녔다. 호주에서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다니기도 했고 지금까지 호주에 있을 수 있도록 비자도 모두 해준 고마운 회사라서 그만 두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전사적으로 여러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하고 직접 스크래치한 솔루션도 있어서 내 회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기억과 감정이 깃든 회사였다.
하지만 적은 인원으로 운용되는 에이전시에 운영/유지보수까지 양이 많아지다보니 본연의 업무보다 “급한” 일을 많이 하게 되서 점점 심적으로 힘들어졌었다. 그래도 작년에는 스스로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오랜 기간 노력을 해봤는데 내 스스로도 퍼포먼스가 떨어지고 집중도 안되는게 느껴져서 너무 괴로웠다. “급한” 일은 이상하게 “급한” 일을 이미 하고 있는데 더 “급한” 일이 나타나서 끝맺지 못한 일만 늘어나게 되는 것 같다. 그랬던 탓에 코드를 만드는 일 자체가 재미없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평소에는 퇴근하고 나면 이런 저런 코드도 만들고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 그냥 넷플릭스 보고 게임만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벌여놓은 일도 있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 기분도 들고, 블로그도 꾸준히 못했다. 그렇게 놀고도 다음날 출근하기 싫어서 일찍 자지도 않은 날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내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만 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들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는 작았고 모두 바쁘기도 하고 누구 붙잡아 얘기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이야기기도 했다. 그래서 멜버른 지인들을 커피와 점심/저녁을 핑계 삼아 만나 내 어려움을 늘 토로했는데 맨날 같은 말 하는 나를 만나 잘 챙겨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 이전에 너무 죄송하기만 하다.
작년 말에 이직을 결정하고 주변 분들에게 이직을 생각한다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었다. 그러던 중 저스틴님이 한 리쿠르터를 레퍼런스 해주셨는데 이력서를 보내고 하루 지나 인터뷰가 잡히게 되었다. 잔뜩 긴장하고 인터뷰를 갔고 php와 php security, angular, database, linux 기본적인 것들을 물어봤다. 다 일반적인 질문들이라 크게 어렵진 않았는데 데이터베이스 질문에 생각보다 막혀서 좀 조바심이 났다. 리쿠르터 분이 인터뷰 전에 “인터뷰이로 가는게 아니라 비지니스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고 대하라”는 얘기를 해줬는데 그런 각오로 인터뷰에 임했더니 좀 더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 끝에 질문할 때 프로젝트 요구사항이라든지 코드의 질이나 개발 환경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호주는 연말에 크리스마스에서 신년 사이 사무실 전체가 휴가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내 인터뷰가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이었다. 그날 오후에 리쿠르터한테 붙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도 아직 정식 오퍼가 오지 않아서 혹시나 싶어 조용히 지내다가 연휴가 끝나고 제대로 오퍼레터를 받을 수 있었다. (레퍼런스를 해주신 저스틴님과 지만님께 또 감사드린다.)
계약서를 확인해보니 일한 기간에 따라 노티스를 주게 되어 있어서 내 경우는 3주 노티스를 줘야 했다. 처음으로 사직서도 작성했다. Resignation letter template을 한참 검색하고 고민해서 썼다. (짜집기했다의 다른 표현.) 그렇게 써서 제출했더니 너무 갑작스럽다고 바로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고 3일 가량을 설득하려 했다. 그런 후 카운트 오퍼를 줬는데 그 사이 한참 흔들리긴 했지만 작년 한 해 힘들었던 기억도 있고 어짜피 한번 말하고 나면 이전과 같은 관계가 될 수 없다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오퍼를 거절하고 다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3주 정리 기간동안 인수인계 기간을 거쳤다. 마지막 날은 오랜 기간 다녀서 기분이 먹먹하긴 했지만 마지막이란 생각에 너무 행복했고 퇴근 후에도 너무 행복했고 다음 월요일 출근 안해서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잘 그만 뒀구나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고 새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대학교로 출근하는 기분도 신선하고 동네 분위기도 사뭇 달라서 아직 어색하지만 팀원도 좋고 좀 더 체계적인 환경에서 개발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 (대학가라서 점심 먹을 곳이 참 많다!) 첫 주라서 기존 코드를 읽고 업무 파악하고 부트스트랩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조만간 프로젝트가 시작될 예정이라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있다. 이전 조직에 비해 커뮤니케이션과 문서화가 월등히 많아서 개발 자체보다는 영어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차근차근 준비해나가야겠다.